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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순조·헌종·철종 3대 60년간에 걸쳐 나이어린 왕들이 즉위하자 안동 김씨·풍양 조씨로 이어지는 세도정치(외척세력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비정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중앙정치의 기강 문란을 가져왔다. 중앙정치의 문란은 탐관오리의 득세를 가져왔으며, 그로 인하여 사회는 동요되고 삼정의 문란을 초래하였다.

삼정이란 봉건적 수취체제의 기본이 되는 전정(토지세), 군정(16-60세에 해당하는 성인남자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내는 세금), 환곡(춘궁기에 관곡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갚도록 한 제도)을 말하는데, 이것이 지방관들의 농간으로 수탈의 수단으로 변하여 농촌사회의 파탄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이래의 지주제의 확대 발전과 농법(이앙법)의 발달은 농촌 사회의 계층을 급속히 변화시켰으며, 봉건적 수취체제는 군현단위로 세금을 징수하는 총액제의 원리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양반 토호들은 빠져버리고 그 몫까지 농민들이 부담하게 되었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산 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 유랑민이 되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고, 이로 인한 민중의 불만이 더욱 커지면서 봉건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주인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은 안으로는 조선사회 내부의 모순이 표출되고 밖으로는 자본주의를 앞세운 서구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봉건사회의 낡은 틀을 무너뜨리며 새로운 사회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전환기였다. 특히,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청· 일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인해 조선에서의 주도권은 청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에서의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고자 경제적 침략에 주력하게 되어 조선은 일본의 식량 공급지가 되어 버렸다. 값싼 생필품을 미끼로 한 일본의 쌀 수입이 늘어나게 되자 국내 쌀값은 폭등하게 되어 조선 민중은 물가고와 식량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관리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민중을 수탈하였으며, 관직을 직접 매매하는 매관매직도 여전히 성행하였다. 돈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은 그 동안 들인 비용 충당과 축재를 위해 각종 부정부패를 저지름으로써 민중의 삶은 고통이 가중되어 갔다.

이러한 봉건사회 경제체제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봉건통치 계급의 무자비한 착취와 외세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한 민중의 저항의식으로 발전되어갔다. 이와 같이 봉건체제의 모순이 깊어가는 가운데 1862년 이래 삼남의 70여 고을에서 농민봉기가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농민봉기는 1892년경에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농민항쟁의 조직과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동학이었다. 동학은 경주출신의 몰락양반 최제우가 자본주의 열강이 점차 침략의 야욕을 뻗쳐오던 1960년 서학(천주교)에 대항하여 창시한 민족종교였다. 동학사상의 핵심내용은 ‘사람이 곧 하늘’ 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 봉건 지배계층은 백성을 오로지 수탈의 대상으로만 보았으나 동학은 평등사상을 제시하였다. 이는 봉건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볼 때, 유교적 기존질서를 뒤흔드는 불온사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 민중의 요구를 반영한 이념이었기에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갔다.